


우리나라 대표 과일 가운데 하나인 배.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배의 대표 품종이 ‘신고’라는 일본 품종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
일제강점기부터 ‘신고’가 우리나라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 입맛을 길들였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1954년부터 우리나라 배 품종 개발에 매달렸다.
현재까지 31종을 내놓으면서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최소 11년, 최장 25년이나 걸리는 배 품종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원경호 농업연구사를 통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연구개발 동기 및 성과의 핵심
배(梨)는 삼한시대부터 재배된 기록이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일이다.
구한말에는 황실배, 청실배 등의 품종을 널리 재배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는 장십랑(長十郞)과 만삼길(晩三吉)이 주로 재배되었고 현재는 새로운 품종인 신고(新高)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년층에서 향수로서 기억하고 있는 배의 모습과 맛을 살펴보면 과실 밑이 툭 불거져 나와 못생겼는데 맛은 새콤달콤하여 겨울철에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별미로서 요약된다.
이러한 특성을 토대로 품종을 추측해보면 장십랑, 만삼길의 특징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노년층이 기억하고 있는 배의 맛은 일본 품종의 특성이다.
더욱이 현재 국내 재배면적의 83%를 차지하고 있는 신고 또한 1915년 일본에서 육성돼 1927년 선발된 품종으로 우리나라에는 1930년대에 들어와 현재 국내 배 산업을 대부분 잠식한 품종이다.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배가 마치 국산 품종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해외 도입 품종이고 외래 도입종에 국내 배 시장의 대부분을 내주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는 우리 입맛에 맞고 국내환경에 적응된 한국형 품종을 육성에 나섰다.
이를 통해 국내 원예산업 주권 회복 및 경쟁력 강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1954년 첫 교배를 시작해 지금까지 개발한 품종은 모두 36품종으로 육성 초기인 1960~1980년대 최초의 한국형 품종 ‘단배’(1969)를 육성했고,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황금배’, ‘추황배’, ‘감천배’ 육성에 성공해 고품질 배 생산의 문을 열었다.
1990년대는 품질향상을 목표로 ‘원황’, ‘만풍배’ 등을 육성해 선진국의 품종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육종목표를 연중생산, 건강 증진, 생산편리성으로 잡고 기능성 물질이 많은 껍질을 함께 먹는 ‘스위트스킨’와 ‘조이스킨’, 신선편이 가공에 적합한 ‘설원’ 등을 개발해 소비 다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단일 요인으로 배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검은별무늬병에 저항성을 가지는 품종인 ‘그린시스’를 개발해 보급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원경호 농업연구사는 “현재는 배를 일상소비형 과실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소량 소비에 적합한 중소과 품종을 위주로 개발하고 있다”며 “갈색배의 고정관념에 벗어나 녹색 및 적색 과피를 가진 이색 배 품종 개발과 함께 건강기능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품종 개발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양배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주로 생산되고 있는데 세계 최고의 동양배 품종을 우리 손으로 개발해 전세계 소비자에게 연중 공급하는 것이 만드는 것이 목표다”고 덧붙였다.
△최소 10년 걸리는 배 육종, 끈기로 이뤄낸 성과
배 품종 육성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개원과 함께 시작됐다.
1954년 봄부터 ‘농사원 원예시험장 과수과’에서 우리 환경에 잘 적응하는 국내 육성 품종을 만들기 위해 우량 품종 간의 교배를 통해 총 528개의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 품종육성의 첫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하나의 품종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수많은 교배조합을 만들고 이들 묘목이 과실을 생산하기까지 최소 3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묘목의 특성과 과실의 품질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다시 3년이 소요되고 이 과정에서 품질이 우량한 개체를 선발하는데 이러한 우량 개체가 선발되는 비율은 전체 묘목의 1% 내외다.
배는 우리나라 전국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지역에 따른 특성 변화가 크지 않고 균일하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각 도 10개 지역에서 적응성을 평가하고 특성이 우수하다고 인정되면 품종으로서 최종 선발된다.
선발된 배 품종 원목은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 보존하면서 새로 나온 가지를 채취해 품종 증식에 활용된다.
일반적으로 육성된 품종들은 나무 지상부의 과실을 수확하는 부위의 것으로서 접수 품종이라고 일컫는다.
원 연구사는 “접수 품종의 뿌리는 약하기 때문에 대목이라고 하는 뿌리를 가진 지하부 과수에 접목해 독립된 나무로 만들어야 비로소 과수원에서 재배할 수 있게 된다”며 “이런 과정을 거치는 품종 육성은 최소 11년에서 25년까지 걸리는 긴 과정으로서 과수 연구의 핵심이 되는 업무다”고 말했다.
△기술로 바뀌는 미래 원예특작산업
국내 배 산업의 변화가 현재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내적으로는 충분히 무르익은 실정이다.
주 재배종을 바꾸고 품종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는 소비자를 비롯해 생산자까지 서로가 공유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해야 할 일은 변화의 물꼬를 터주는 일이다.
단일 품종 편중재배에서 벗어나 다양한 품종이 시장에 선보일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유용한 정보들을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
국내 육성 품종이 우수함에도 지금까지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은 홍보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또 많은 사람들이 국내 배 시장은 침체기에 빠져있어 단기간에 회복되기 어렵다는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침체기에 빠져있기 때문에 개선될 여지만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배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소비자 모두가 침체 원인을 알고 있으며 해결 방안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배 산업이 재도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육종 기술 또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다.
과거에는 교배 집단을 구축하고 이들의 특성 평가를 통해 우량 개체를 선발하는 관행 육종 시스템만을 운영했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분자생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육종 기술 또한 발전하고 있다.
목표 특성과 관련된 식물 유전자를 찾고 이에 대한 생체 정보를 활용하여 대량의 집단에서 목표 특성을 보유한 개체만을 신속하게 선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과수 분야에서는 분자생물학을 이용한 육종 기술 개발이 타 작목에 비해 괄목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기술의 안정화가 궤도에 오르고 있기 때문에 곧 상용화 될 예정이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배연구소 원경호 농업연구사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육종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주고 있어 분자생물학 기술을 활용해 특정 육종 목표와 연관된 표지들을 개발하고 이들을 개체 선발에 활용함으로써 유용한 개체들만을 효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게 됐다”며 “현재 검토 중인 형질은 병해충 저항성 및 과피색 선발 위주로 연구가 되고 있지만 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예는 무궁무진하다”고 전했다.
이어 “다양한 기능성 물질을 함유한 개체만을 선발할 수도 있으며 원하는 형질을 조합하고 디자인해 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개체의 선발까지 가능케 할 수 있다”며 “이를 활용한다면 시장이 요구하는 형질에 부합하는 품종을 빠르게 육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 트렌드를 분석하여 미래 수요에 대응함으로서 막대한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서는 기존 관행 육종 시스템을 유지하되 육종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는 기술 개발을 병행함으로서 육종 시스템을 고도화하여 미래를 선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홍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