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츠금융그룹이 지난해 5월 홈플러스에 1조 3000억 원 규모의 대출을 내주면서 1년 내 2500억 원을 조기 상환해야 한다는 특약 조건을 삽입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만약 조기 상환이 안 되면 담보로 잡아둔 홈플러스 부동산들을 회수해 강제 처분하는 조항도 넣었다. 지난달 말 신용등급이 강등된 홈플러스는 자금 조달 상황이 꼬이게 되자 메리츠 측의 이 같은 담보권 발동을 우려했고 기습적으로 회생 신청에 나섰던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투자은행( IB ) 업계에 따르면 메리츠증권·메리츠화재·메리츠캐피탈 등 메리츠금융지주(138040) 3개 자회사들은 홈플러스에 지난해 5월 고정금리 연 8%, 총 1조 3000억 원의 3년 만기 대출을 실행했다. 그러면서 홈플러스가 보유한 전체 63개 매장을 담보로 잡고 외부 감평기관과 함께 이 자산들의 전체 가치를 총 4조 9900억 원으로 평가했다. 담보인정비율( LTV )은 25.95%로 계산했다.
메리츠 측은 대출을 내주면서 12개월 내 2500억 원, 24개월 내 누적 6000억 원을 상환하라는 특약 조건을 삽입했다. 또 홈플러스 채권 부도가 발생하면 차주에 불리한 조건을 넣는 등 여러 특약들을 추가해뒀다. 이 특약들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홈플러스가 보유한 부동산들을 강제 처분해 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하는 촘촘한 계획도 수립했다.
지난해 급하게 1조 원 넘는 대출이 필요했던 홈플러스의 최대주주 MBK 파트너스는 당시 이 조건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강제 매각 조항 발동을 우려해 올 상반기 여러 부동산 매각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매각 계획이 지연된 데다 신용평가사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홈플러스의 기업어음( CP ) 신용등급을 강등( A3 → A3- )하며 조달 통로가 막히자 마지막 카드로 ‘법원행’을 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IB 전문가들은 현금 흐름 대비 너무 큰 빚을 짊어진 홈플러스가 고금리 대출을 찾으면서 예견된 결과를 낳았다는 관전평도 내놓고 있다. 실제 조기 상환이 불발돼 자산이 강제 처분되는 상황에 처했다면 MBK 는 이를 막기 위해 이자율 상승 등 더욱 혹독한 추가 조건을 내밀면서 직접 신용보강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IB 업계 관계자는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MBK 는 금융 채무 동결을 목표로 메리츠 모르게 기습 작전을 썼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메리츠와 MBK 간 갈등 구도가 발생한 게 이번 사태에 영향을 줬다는 평가도 한다. 지난해 10월 고려아연은 MBK 에 맞설 경영권 방어 전략으로 대규모 자사주 공개매수를 실행했다. 메리츠는 이 과정에서 1조 원어치 긴급 사모사채 투자를 해주며 최윤범 회장을 측면 지원했다. 당시 6.5% 금리로 발행된 사채는 재무 상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MBK 는 지난해부터 영풍과 연합군을 형성, 현재 고려아연 지분 총 40.95%를 보유하며 최대주주 지위에 올라 있다. 추후 이사회를 장악하고 회사 경영에 나서게 된다면 악화된 고려아연 재무 상태를 개선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 사모펀드( PEF ) 관계자는 “메리츠와 MBK 가 서로 기습 전략을 쓰며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 것도 이번 사태의 뒷배경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한편 금융감독원은 이날 홈플러스 회생 신청과 관련해 CP 인수 증권사인 신영증권과 한국신용평가·한국기업평가 등 신용평가사 2곳에 대한 검사에 착수했다. 신영증권은 개인투자자에게 홈플러스 관련 CP 와 회사채, 전자단기사채( STB ), 자산유동화 전자단기사채( ABSTB ) 등을 판매했다. 아울러 홈플러스 대주주인 MBK 에 대한 검사도 임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금감원은 기관 전용 PEF 와 업무집행사( GP )에 대한 검사권을 갖고 있다.